VII. 바르트부룩(Wartburg)에서의 체류 (A.D. 1521-1522)

A. 건설적인 기간

마르틴 루터가 바르트부룩에서 체류한 것은 그의 일생에 아주 건설적인 기간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고 신약을 마쳤는데 이는 라틴이 아닌 헬라어 본문에서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그것은 1522년 9월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막”에 있는 동안 면죄부를 계속해서 공격해왔습니다. 그는 자세하게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 당시는 또한 심한 고난의 때였습니다. 그는 그의 친구인 멜란히톤(Melanchthon)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영 안에서 불타올라야 하지만 사실은 내 육안에서 정욕과 나태함과 게으름과 졸음으로 불타고 있네...여기 갇혀서 죄에 잠긴 나를 위해 부디 기도해 주게. [16]

B. 복음파와의 투쟁

또한 이 때 루터는 유럽에 있는 여러 복음파와 투쟁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츠빙글리와 의견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재침례교도와 슈벵크벨트(Schwenckfeld)와 뮌춰(Muntzer)를 포함한 츠비카우(Zwickau)의 선지자들과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 몇몇 복음주의자들의 믿음에 대한 강한 저항은 루터보다도 더 분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저자는 츠빙글리를 따르는 이들 사이에서 생겨난 재침례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에라스무스(Erasmian) 프로그램의 또 다른 방면으로서 츠빙글리에게도 귀한 것이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의 회복으로서 산상 수훈을 그들의 규례로 취해 맹세와 전쟁이나 시민 정부안에서 칼의 사용과 사유 재산과 장신구와 환각이나 술취함을 거절한다. 평화주의와 종교적인 공산주의와 단순함과 절제가 그들 공동체의 표시이다. 교회는 반드시 두 번 거듭나고 제자들의 언약에 헌신적인 자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영적 체험과 도덕적 성취라는 두개의 시험으로 알아볼 수 있는 선민들의 관념을 본다. 교회는 영아 침례가 아니라 성숙했을 때 받는 침례로 상징되는 거듭남에 의존해야 한다. 모든 지체는 전도 여행에 착수할 준비가 된 성직자나 사역자나 선교사여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하지만 그러한 교회는 개종하지 않은 공동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나라가 모든 백성들로 구성된다면 교회와 나라는 나뉘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종교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17]

위의 저자는 그들의 삶이 그들 주위에 사람들에게 간증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헤세의 필립(Philip of Hesse)은 루터 교파보다 분리파 교회 신도사이에서 생활의 발전을 더 목격했고 루터파의 사역자로서 재침례파에 반대하는 글을 쓴 이는 그들이 매우 천해보이는 가난한 이들 안으로 들어가고 기도를 많이 하고 복음서를 읽고 외적 생활과 선행과 이웃을 돕고 주고 빌려주는 것에 관해 특별히 많은 이야기를 하고 물건을 공유하고 누구에게도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모두 형제 자매로서 살고있다고 간증했다. 이들이 바로 색스니의 존(John of Saxony) 선제후에 의해 처형당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다시 한번 교회의 씨앗이었음이 증명되었다.[18]

...순교자들의 피는 다시 한번 교회의 씨앗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비록 재침례파의 순교로 인해 혼동스러웠지만 그들을 향한 그의 태도는 모순이었습니다. 한면에서 그는 다른 이들에게 결코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요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반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시장이 거짓 선지자들을 죽여도 되는지에 관해 물을지 모른다. 나는 죽어 마땅할지라도 사형에 대해서는 성급히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천주교도와 그리스도 앞에 유대인들 때문에 무서운데 이는 거짓 선지자와 이단의 사형 법에 있어서 오직 가장 거룩하고 결백한 이들이 죽었기 때문이다...나는 거짓 교사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추방당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19]

한편 1531년 멜란히톤이 작성하고 루터가 서명한 메모에서 보면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강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일관적이려는 것이 루터에게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메모에서 루터는 성직자 직위를 거절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국가교회의 분리를 도운 이들은 선동적이며 그러므로 교회의 최고의 유익을 반대하는 이들이라고 느꼈습니다. 다음은 이 메모에 남긴 루터의 추신입니다.

나는 주장한다. 비록 그들을 칼로 벌하는 것이 잔혹하게 보일지라도 그들이 말씀의 사역을 정죄하고 확립된 교리도 없이 진리를 억누르고 시민의 지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더 잔혹하다.[20]

C. 급진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가르치고 전파하고 저술합니다.

 

루터가 바르트부룩에 머무는 동안 그의 동료중 몇몇은 적극적으로 급진적 변화를 개혁하고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루터역시 변화의 필요를 깨닫고 있었지만 적당히 할 것을 조언했습니다.

루터는 개혁이 항상 힘이 아니라 부드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면죄부와 모든 천주교도들을 반대하지만 힘으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가르치고 전파하고 저술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로마 교황을 상당히 약하게 하여 어느 군주나 황제도 그러한 손실을 입힌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을 했습니다.’[21]

그후 루터가 자리를 비웠던 1521년과 1522년에 당황할 정도로 빠르게 계속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성직자들이 결혼하고 수도사들이 결혼하고 수녀들이 결혼했습니다. 수녀와 수도사들은 심지어 서로에게 장가들고 시집갔습니다. 출가한 이들도 머리를 기르도록 허용되었습니다...성직자들은 제의가 아닌 평범한 옷을 입고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미사의 일정부분은 독일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는 중단되었습니다. 철야기도는 중단되었고 저녁기도는 변경되었고 신상들은 부서졌습니다. 금식하는 날에 고기를 먹었습니다. 귀족들은 후원금을 중단했습니다. 성직 장학금을 더 이상 후원하지 않았기에 대학의 등록률은 떨어졌습니다.[22]

1. 독신주의

어떤 이들은 제사장의 독신주의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멜란크톤은 이 문제에 관해 망설였는데 이는 수도사의 서원중 일부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주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하여 이러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 수도사도 수도사 옷을 입는다고 구원받을 수 없고 수도원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고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떠나고 수도원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복음서에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23]

2. 미사

미사에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텐베르크에서 오거스틴의 교단에서 루터와 친근했던 이들은 모두 함께 미사를 폐지했습니다. 이것은 “미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지 제사가 아니며 믿는 이들의 교통”이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미사의 제사의 성격만을 제하려던 루터에게는 너무나 극단적이었습니다.[24]

3. 성찬식

성찬식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인 안드레아 칼스타드(Andreas Carlstadt)와 루터의 절친한 동료들은 형제 자매들이 떡은 물론 잔도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했었는데 이전에는 금지되었었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실행을 회복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칼스타드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그와 모이는 이들을 “헤르 닥터(Herr Doktor)”라 부르는 대신 “좋은 이웃” 혹은 “안드레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평범한 회색 외투가 그의 평소의 특이한 옷을 대치했습니다. 회중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는 대신 칼스타드는 농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4. 그림들

칼스타드가 성당에서 모든 그림을 떼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군중들은 성당에 들어가 벽에 있는 성상들을 떼고 신상들을 부서뜨렸습니다. 개혁이 결박한 것을 두려워한 루터는 1522년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폭력과 파괴를 사용하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1524년 제나(Jena)에 있던 칼스타드가 루터를 방문했습니다. 칼스타드는 개혁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지만 그러한 비난은 거짓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칼스타드가 살고 있던 올라문데(Orlamunde)를 방문했을 때 루터는 회중들의 개혁의 기질을 관찰하고 칼스타드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루터는 칼스타드의 추방에 동의하여 칼스타드는 임신한 아내와 아이들은 나중에 그에게 가도록 하고 색스니(Saxony)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칼스타드는 루터가 그러한 입장을 취할 줄 몰랐습니다:

[칼스타드]는 루터가 윔즈 회의 후 “듣지도 않고 유죄를 입증하지도 않고”정죄한다는 바로 그 똑같은 말을 하며 떠났고 그는 그의 예전 동료로서 두 번째 교황주의자이자 적그리스도의 사촌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25]

색소니에서 추방당한 후 칼스타드는 독일 남부 도시들로 여행했습니다. 스트라스버그(Strassburg)의 사역자들은 루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칼스타드에 의해 설득되지 않았지만 그의 주장중 많은 것들이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당신의 옛 동료를 그렇게 몰인정하게 추방한 것으로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바셀(Basel)과 취리히(Zurich)에는 그에게 동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26]

5. 시민 정부

시민 정부 역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칼스타드는 이 분야에서 또한 목소리를 높이며 교회사에 어떠한 시민의 간섭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특별히 정부가 로마 카톨릭이라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정부가 “복음주의적”이라는 데에는 항상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은 그의 편을 드는지 아니면 로마의 편을 드는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루터는 교회가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부인하며 이러한 것을 시민 권위들에게 위임했습니다.

다니엘이 말한 것처럼 적그리스도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부서질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폭력은 그를 더 강하게 만들뿐이다. 전파하고 기도하지만 싸우지는 말라. 모든 속박되는 것들이 제해지는 것이 아니라 임명된 권위들에 의해 사용되어야만 한다.[27]

루터는 시민 정부의 필요를 깨달았습니다. 루터의 관점을 바인튼(Bainton)이 다음과 같이 의역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행동할 때 사람이 행하는 방법이고 그럴 경우에는 법이나 검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는 어디에도 없고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거하는 교회안에도 없다. [28]

그 같은 저자가 교회와 시민 정부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관점을 평가했습니다.

...교회와 국가가 동맹할때 하나는 항상 지배하고 그 결과는 신정(Theocracy)이나 제왕적 교황주의(caesaropapism)이다. 루터는 교회와 국가를 나누는 것을 거절했고 신정을 거부하고 그러므로 제왕적 교황주의(제왕적 교황주의(caesaropapism))에게 문을 열어 놓았다. [29]

6. 구약의 실행들

어떤 구약의 실행들은 그때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실행들을 회복하는데 강하게 저항했고 그리스도가 율법의 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끝났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율법은 마음 안에 적혀 있었습니다(히 8:10).

7. 농민 전쟁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있는 동안 농민 전쟁이 독일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농민들이 일어나 정부를 타도하는 것이 루터의 전파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걸쳐진 많은 부정 행위의 결과라고 느꼈습니다. 바인톤은 농민 전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농민 전쟁은 청교도 개혁의 결합은 없었는데 이는 분명한 프로그램도 없었고 조리 있는 인도직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단체들은 소작농의 절대권을 원했고 어떤 이들은 계급 없는 사회를 원했고 어떤 이들은 봉건제도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어떤 이들은 모든 지배자들이 없어지는 것을 원했다...가끔 지배자들은 소작농들이었고...가끔은 기사들(knights)이었다. 나뉜 줄들은 협력하지 못했다. 종교의 연합조차 없었는데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가 양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30]

루터는 농민 전쟁을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농민들이 열린 폭동 안에 있으면 그는 하나님의 율법밖에 있는데 이는 폭동이 단지 살인이 아니라 온 땅을 공격하고 온 땅을 허비하는 큰 불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동은 살인자와 피흘림이 가득한 땅을 동반하며 과부와 고아들을 만들며 큰 재앙과 같이 모든 뒤집히게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 것도 저항보다 유해하고 상처를 주거나 악마적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며 비밀스럽게나 공개적으로 치고 살해하고 찔러 죽이라. 이것은 마치 미친개를 죽여야 할 때 그 개를 죽이지 않으면 그 개가 당신과 당신가 함께 한 온 땅을 치는 것과도 같다. [31]

농민 전쟁에 대한 루터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농민의 전쟁동안 긍휼없는 억압을 주장했듯이, 후에 그는 관용이 모든 이들에게 뻗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D. 확대된 서신왕래

그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루터는 계속해서 서신왕래를 했습니다.

1. 보헤미아 형제회

루터는 보헤미아 형제회에게 서신을 보내 교황을 반대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루터는 그들이 그와 관점을 달리 하지만 이 형제회를 온전히 인정했습니다.

2. 헨리 8세

영국의 헨리 8세는 비록 그 자신이 카톨릭에게 매우 충실하지 않으면서도 루터가 카톨릭 교회에 저항한다고 루터를 비난했습니다. 헨리 8세의 비난에 대한 루터의 답장은 “헨리의 통치에 반대함”이라는 다소 거친 제목의 논문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카톨릭 영주로서 헨리는 마르틴 루터를 “하나님의 은혜로된 비텐부르크의 사역자”라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하나님의 치욕인 영국의 왕 헨리께”라고 답했습니다. 비록 후에 루터가 헨리 8세와 화해하려 했지만 이미 금이 갔습니다. 헨리는 계속해서 루터를 만족하지 못한 자유“의 전도자라고 여겼습니다.

3. 에라스무스

루터는 에라스무스와 계속해서 서신왕래를 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빠른 속도로 벌어지는 개혁에 대해 방심하지 않았으며 교황과 교황제에 반대하는 루터의 견고한 선포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당분간 루터가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는 글을 썼습니다.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일지 모르나 합당한 때가 있다.” 그는 루터가 거칠다고 비난했습니다. 한편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겁쟁이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못 본척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VI.

  보름스 회의(Diet of Worms, A.D. 1521)

VII.

  바루트부르크(Wartburg)에서 머뭄 (A.D. 1521-1522)

VIII.

  루터주의의 급속한 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