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총회, 회의, 토론

루터가 무엇인가를 보면 볼 수록 그는 더욱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더 말하고 토론하고 강의할수록 그는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을 더 격동시켰습니다. 결국 그들은 루터가 침묵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할 말이 너무 많았고 난처해 졌습니다.

A. 오거스티니안 총회 (Augustinian Convention)

루터를 잠잠케 하려는 시도가 다섯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1518년 2월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서 있었던 오거스티니안 종교단 회의였습니다. 루터는 그가 믿는 것을 변호하고 그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는 신성한 은혜와 사람이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루터는 그가 그 총회에 올 때는 걸어왔지만 갈 때는 마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고 말하며 이 총회에서 그의 모든 반대자들을 이겼다고 느꼈습니다.

B. 로마로 소환됨

교황은 그 결과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여전히 말하고 있었고 그의 관점은 로마를 너무나 난처하게 했습니다. 그를 막으려는 또 한 번의 시도로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했습니다. 그러나 색스니의 프레드릭(Frederick of Saxony)이라는 선제후(Elector)는 대학때 그가 가장 좋아하던 신학자인 루터와 관계를 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그 시점에서는 더 이상 그 문제를 막을수 없다고 느끼고 소환을 중단했습니다.

C.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의 복종

1518년 10월 또 한번 소환했습니다. 가예타노 추기경(Cardinal Cajetan)이 교황의 대표 역할을 했던 아우구스부르크에서의 회의로 불렀습니다. 루터는 가예타노에게 그는 여전히 교회에게 복종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선포했지만 담대하게 교황의 절대적인 권력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그의 복종을 선포하면서 루터는 로마 교회에서 잘못되었다고 그가 느꼈던 것들을 허물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D. 알텐부르크(Altenburg)에서의 토론

교황은 여전히 불만스러웠습니다. 1519년 1월, 알텐부르크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당시 교황의 대표는 루터와 평안한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고 말하던 본 밀티츠(Von Miltitz)였습니다. 그는 루터를 잠잠하게 하려 친절과 감언으로 루터에게 다가갔습니다. 그 결과, 루터는 그의 반대자들이 침묵하는 한 그도 침묵을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교황에게 겸손한 편지까지 쓸 마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하지만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더욱,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경의 하는 논물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루터는 면죄부가 연옥에서 갖는 효능에 대해서는 부인했습니다.

E. 레입식(Leipsic)에서의 토론

사람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루터를 잠잠케 하려던 다섯 번째 시도는 레입식에서의 토론이었습니다. 교황의 사자인 엑(Eck)이 루터의 동료인 칼쉬타트(Carlstadt)에게 토론을 신청했습니다. 엑이 칼쉬타트를 부를 때 루터와 함께 갔으므로 엑은 사실상 루터 또한 부른 것이었습니다. 토론은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이 토론은 면죄부보다 더 많은 주제를 다루었기에 루터는 이러한 토론에 만족했습니다. 그는 이 기회를 사용하여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명백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교황의 특별한 신성한 권리를 부인하고 열쇠와 열쇠의 권세는 교황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졌다고 말했습니다(마16:19). 교회는 열쇠와 관련 있는 권위를 사용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탁월성을 믿었지만 구원받기 위해 교회가 필요하다고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그리스정교나 동방 교회도 서방교회나 로마 교회처럼 정당하다고도 말했습니다.

이러한 토론에 참가했던 어떤 사람이 마르틴 루터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틴은 중간정도의 키였는데 연구와 근심으로 연약한 몸이어서 그의 몸의 뼈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활기가 있었고 목소리는 날카롭고 분명했다...그는 쾌활하고 확신이 있었으며 그의 반대자들이 그를 얼마나 괴롭히던지 간에 항상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2]

그는 또한 루터의 반대자인 엑(Eck)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엑은 키가 작고 단단하고 네모났으며 배우나 포고를 외치는 사람처럼 강한 폐를 갖고 있는 완전한 독일 목소리를 갖고 있었지만 분명한 소리보다는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다...그의 얼굴보다는 입과 눈이 신학자보다는 정육점 주인이나 군인같이 보이게 했다. [3]

토론의 결론으로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으로 장비 되어 있는 단순한 평민은 교황이나 종교회의 없이도 그 이상으로 믿을 수 있다...

 

"...성경으로 장비 되어 있는 단순한 평민은 교황이나 종교회의 없이도 그 이상으로 믿을 수 있다.… 교회나 교황 누구도 믿음의 조항을 만들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 성경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교황과 종교회의를 거부해야 한다."

엑은 “하지만 이것은 [허스를 가리키는] 보헤미안 바이러스(Bohemian Virus)로서 교황과 종교회의와 박사와 대학들보다 자기 자신의 성경 해석에 더욱 무게를 싣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4]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나는 단지 주장하는 것뿐 아니라 내 피와 죽음을 다해 진리를 변호하도록 묶였다.

 

나는 단지 주장하는 것뿐 아니라 내 피와 죽음을 다해 진리를 변호하도록 묶였다. 나는 자유롭게 믿고 싶고 종교회의든 대학이던 교황이던 누군가의 권위에게 종노릇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카톨릭이 주장하던 이단이 주장하건, 종교회의가 승인을 했건 비난하건 간에 내게 진실이라 보이는 것들을 대담하게 말하겠다. [5]

레입식을 떠나며 이것이 루터의 인생의 전환점임이 분명해 졌습니다. 그는 이러한 말을 하며 떠났습니다.

비참하고 소망 없고 불경스런 로마여 안녕!...우리가 떠나 그곳이 용과 귀신과 마녀들의 거처가 되게 하자! [6]

공격은 더욱 강해졌고 위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I.

  초기 시절과 훈련

II.

  95개의 논제

III.

  로마 교황직과 전통에 대한 역행

IV.

  총회, 회의, 토론

V.

  루터의 관점이 전파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