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V. 루터의 사역에서 결여된 것들

A. 로마 카톨릭 실행들을 존속함

루터의 사역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결여된 것이 있었습니다. 루터가 세례의 거듭남이나 유아 세례나 경배의 형태들을 포함한 많은 로마의 실행들을 존속시킨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한 저자에 말에 의하면 소위 말하는 일요일 예배에서의 변화는 라틴 미사의 본질적 구조를 고스란히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독일 미사가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1536년 스위스에서 온 간단한 예배에 익숙한 방문객은 루터주의자들이 무릎 꿇기나 미사의 제의나 제안이나 청중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나 성서대나 양쪽에 설교단이 있는 것과 같은 천주교의 많은 요소들을 존속하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거양 성체(elevation of the elements)은 1542년까지 존속되었다. [21]

B. 그리스도의 내적 역사에 관한 불충분한 강조

교회의 정통에서 워치만 니는 계시록 2-3장에 있는 일곱 교회와 교회 역사의 1900년을 비교하며 사대 교회(계3:1-6)가 루터의 역사로 생긴 개혁 교회들을 나타내는 것을 보여줍니다. 워치만 니는 계시록 3장 2절,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님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에서 중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주님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루터의 역사가 나쁘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고 말씀하셨다. 좋기는 하나 아주 좋은 것은 아니다. 주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완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완전한 주님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것을 요구하신다. [22]

루터는 주로 객관적인 문제들을 회복했으나 믿는 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주관적인 역사는 거의 대부분 무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하지 안았습니다.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루터 자신은 항상 개혁 운동으로 야기된 실제적이고 강하고 개인적인 종교의 결여를 마음에 깊이 새겼으며 종종 이 결여로 비탄해 했다. 그는 초기에 슈벵크벨트(Schwenckfeld)에게 “친애하는 캐스퍼(Casper)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흔하지 않네. 그런 사람 둘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 소원이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옛 교회를 흔들 수 있는 거대한 힘으로도 루터는 오래토록 축적된 것들을 걸러낼수 없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살아있는 내적 핵심을 붙들 수 없었다... [23]

C. 하나됨을 경시함

후에 루터는 개혁의 부족과 개혁을 완성시키거나 온전케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깨달은 슈벵크벨트(Schwenckfeld)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초기인 1524년에 실레지아(Silesia)모든 형제회에게 하는 훈계에서 [슈벵크벨트]는 그가 “내적 점유의 결여”라 부르는 개혁의 결과로 사람들 생활 속에 자리한 변화의 피상과 “[기초적인] 구원의 약속들”에 머무는 경향인 새 개혁의 외관을 주의하라고 했다. 그는 루터의 가르침의 중심 원칙들을 찾는 검토를 했고 모든 것을 승인했으나 동시에 그것들이 오직 지적이고 공식적으로 관점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거의 얻을 것이 없을 것임을 지적했다. 그는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과 영의 가장 깊은 곳을 움직이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믿는 이 안에서 새 사람을 산출하는 그분에 대한 감사를 간청했다. [24]

만약 루터와 슈벵크벨트사이에 교통의 친근한 끈이 발전되었다면 좋았을 것이었습니다. 슈벵크벨트는 루터에게 뛰어난 조화였으며 그의 가르침에 온전한 보완이었습니다. 슈벵크벨트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주관적인 체험에 대한 문제가 결여되었을 것입니다. 슈벵크벨트는 루터와 교통을 하려 했습니다. 그는 형제간의 교통을 바라며 루터에게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다음은 루터의 짧은 대답입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바보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바보 소리를 그치지 않겠다면 적어도 마귀가 그를 통해 토해내는 소책자들로 나를 괴롭히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1556년에 열린 신교도 국가들의 성직자 회의에서 슈벵크벨트는 그 시대의 가장 통렬한 언어로 탄핵되었고 국가 당국에도 그를 위험한 이단으로 고소하도록 강요받았다. [25]

루터의 거절과 루터주의 자들의 핍박으로 슈벵크벨트는 스스로 귀향을 가서 다시는 그의 고향인 실레지아(Silesia)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30년 동안 그는 영구적인 거처 없이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이 땅위의 좋은 거처를 원했다면, 내가 만약 영원한 것보다 순간적인 것을 더 관심 했다면, 내가 만약 나의 그리스도를 버렸다면, 내 조국에서 내 집에서 머물렀을 것이며 내 친구들을 위해 이 세상의 세력을 가졌을 것이다. [26]

그가 루터에게서 멀어진 것은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D. 교회와 세상의 분별의 결여

루터의 개혁의 역사중 부족한 또 한가지는 교회와 세상의 분별의 결여입니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 제도의 지역적인 특성을 유지했고 결국 이것은 국가 교회들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 안에는 많은 불신자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성직자중에도 불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 합당한 자격의 기본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 손상되었습니다. 교회와 국가의 연합으로 인하여 교회를 대표하여 가끔은 검(sword)이 사용되었습니다. 몇몇의 저자는 루터가 하나님의 갈망에 따른 교회의 진정한 본질과 실행을 보았지만 교회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국가 교회들에 관하여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발생했으니 그것은 개신교가 우리에게 옳은 교회를 보여 주지 못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도리와 공개된 성경은 가는 곳마다 국립교회를 세웠을 뿐이다. 루터파는 허다한 나라에서 국립 교회를 세웠고 후에 영국에서도 성공회(Anglican Church)가 있었으니 이것 역시 국립 교회인 것이다. 로마로부터 교회의 성질은 변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과 공개된 성경은 있었으나 교회는 여전히 로마 교회를 닮아가고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 않았다. 종교 개혁 당시에도 교회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루터는 교회를 개혁한 것이 아니다. 루터 자신도 말하기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에 그치지 말고 많은 것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루터는 멈추지 않았으나 그들은 거기에서 멈췄고 이제는 다 되었다고 말했다. 신앙은 초대로 돌아갔으나 교회는 조금도 고쳐지지 않은 것이다. 과거의 로마(세계적)교회가 이제는 영국의 국립 교회로 변하고, 독일의 국립 교회로 변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본 바와 같이 종교 개혁은 교회를 초대 교회의 상태로 돌아가게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세계 교회를 국립 교회로 변하게 했을 뿐이다. [27]


IX.

  교회에 관한 루터의 관점

X.

  목자로서의 루터

XI.

  루터의 결혼

XII.

  루터의 죽음

XIII.

  루터를 통해 회복된 항목들

XIV.

  루터의 사역에서 결여된 것들

XV.

  결론